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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F 리틀 텔레비전

게임을 ‘소장’하지
못하는 시대

글/사진 업무지원실 홍보팀 정수영 대리


내 취미는 비디오게임 ‘수집’이다. 대략 3년 정도 전부터 확실해졌다. 비디오게임을 플레이하는 것보다 수집하는 것에서 훨씬 더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어찌 보면 세월이 흐르면서 취미의 성격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엔 용돈을 모으고 또 모아서 겨우 산 게임 하나를 밤새도록 즐기기도 했었다. 지금은 한 달에 평균 1개 이상의 게임을 사지만 엔딩을 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게임이 고프던 시절엔 돈이 없었고, 돈이 생기니 이젠 시간과 여유가 없어졌다. 전형적인 비디오 게이머의 노화 과정이다.

대략 이런 상황이다.

비디오게임은 순수하게 유희라는 목적을 가지고 탄생했다. 태초의 비디오게임은 점 두 개와 선 하나뿐이었으나, 최근에 출시되는 게임들은 그 장엄한 비주얼과 음악이 영화와 견줄 정도로 발전했다. 펍에서 간단한 내기용으로 쓰이던 게임이, 이제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깊이 있는 이야기와 감동을 들려주고 있다. 이처럼 비디오게임은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비약적으로 발전해 멀티미디어의 총아로 거듭나고 있다. 나 역시 한 사람의 ‘비디오 게이머’로서 이러한 게임 산업의 발전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

흔히 알려진 최초의(그러나 사실 최초는 아닌) 비디오게임 'PONG'과 발매를 코앞에 둔 신작 게임 ‘사이버펑크2077’

‘소프트웨어’인 비디오게임이 발전하면서 이를 담을 그릇인 하드웨어도 같이 발전해왔다. 16비트의 상징인 슈퍼패미컴, 어린 나에게 CD라는 신문물을 소개해 주었던 플레이스테이션, 그리고 SD화질의 시대가 끝나고, (HD로 귀결되는) 고화질의 세상이 왔음을 선포한 XBOX360 등 시대가 변하면서 콘솔 하드웨어 역시 끝없는 세대교체를 해왔으며, 이는 현재도 계속해서 진행 중이다.

고용량 매체 CD의 시대가 왔음을 알린 플레이스테이션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첫 콘솔 도전작 엑스박스 (출처 : 내꺼)

초등학생 시절, 부잣집 친구네 놀러 가 처음 본 플레이스테이션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나이를 먹어서 제대로 남아있는 그 시절 기억들이 거의 없음에도, 그 기억만큼은 놀랍도록 생생하다. 오락실에서 보던 게임을 그 화면 그대로 자기 집 안방 TV로 플레이 할 수 있다니, 초등학교 5학년 필자의 눈에 그 광경은 컬처 쇼크 그 자체였다. 그걸 보고 오니 집에 있던 8비트 게임기가 열심히 (오락실을 흉내 내어) 그리는 조악한 그래픽은 당연히 눈에 찰 리가 없었고, 생떼를 써가며 부모님께 게임기를 사달라고 졸라보기도 했다. 허나 그 어렸던 시절에도 내 욕심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 수 있었을 정도로 ‘일제’ 게임기들은 비현실적으로 비쌌다.

데이터를 그때그때 읽어야 하는
CD 매체의 특성으로, 당시 게임들은 잦고 긴 로딩으로 매우 악명 높았다.
하지만 그 시절 나에겐 지루한 로딩 화면마저 황홀하게만 보였다.
어릴 적 기억 때문에 입사 후 본격적으로 ‘돈을 벌게’ 되면서 나는 유년기의 한을 뒤늦게나마 풀고 있다. 플레이스테이션4나 스위치처럼 최신형 콘솔 게임기는 물론, 온갖 레트로 비디오 게임들도 기회가 될 때마다 구매하고 있다. 어림잡아 갖고있는 비디오게임 타이틀 수는 300개가 살짝 넘는다. (300개를 넘긴 뒤부터 전수조사는 포기했다) 하지만 그들 중 대다수는 구매 후 간단한 실행 테스트만 했을 뿐, 플레이는 하지 않았다. 그 많은 게임을 다 할 시간도 없거니와 오래된 게임들은 아무래도 지금 즐기기에는 너무 낡아서 지레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갖고 싶어 열심히 모아 온 게임들. 엔딩을 본 게임은 전체의 10%도 안될 듯 싶다.

수집에 대한 집착으로 PC 엔진 등 몇몇 희귀한 하드웨어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비디오 게임기를 수집하는 데 성공했고, 주기적으로 전기 밥을 먹이며 ‘아가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는 걸 낙으로 여기며 살아오고 있다. 플레이는 하지 않은 채, 반복해서 돌아가는 데모화면만 한참 동안 바라본다. 브라운관 TV가 보여주는 옛날 게임들의 그래픽을 보고 있으면, 지나간 과거에 대한 애틋함이 전해져 온다. (비록 실제 시력에는 좋을 리 없을 테지만) 내가 이 게임과 게임기를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 무언가 허해진 마음이 메워지고 충만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수집난이도가 매우 높은 네오지오 게임들.
이걸 1994년 당시에 갖고 있었다면 동네 초통령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비디오게임 컨트롤러만 모아놓은 박스 (출처 : 내거)

그런데 앞서 말한 비디오 게임의 발전이 놀랍게도 내 소중한 취미를 위협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방대한 그래픽 데이터와 고품질의 음원이 들어가면서 게임 한 편의 용량이 수십 기가바이트는 우습게 넘어갔고 이제 물리적인 그릇에 게임을 담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1997년 무려 CD 4장의 구성으로 출시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파이널판타지7의 게임데이터는 약 1.7기가바이트였지만, 2018년 출시한 파이널판타지15의 경우 설치 용량만 150기가바이트를 요구한다.)

정신 나간 설치 용량을 자랑하는 파이널판타지15, CD로 치면 215장이 필요하다.

초창기 롬팩 카트리지로 부흥한 기록 매체는 CD를 넘어 (중간에 이상한 규격들은 제외하고) 블루레이 디스크로 그 계보를 이어왔지만 앞으로는 디지털 다운로드에 그 역할을 넘겨줄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플레이스테이션과 스위치 같은 게임기들도 전부 자사의 온라인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으며, PC 게임의 경우 아예 스팀이나 에픽 스토어 같은 온라인 게임 유통 플랫폼을 통해 게임을 구매하는 것이 기본일 정도로 오프라인 패키지는 빠르게 쇠퇴하고 있다.

사이버펑크2077의 PC 버전 패키지. 저 패키지 안에는 CD는 없고 다운로드 코드가 적힌 종이쪼가리만 한 장 들어있다(!).

(왼쪽) 사이버펑크2077의 PC 버전 패키지. 저 패키지 안에는 CD는 없고 다운로드 코드가 적힌 종이쪼가리만 한 장 들어있다(!).

(오른쪽) 최대 규모의 온라인 게임 유통 플랫폼 ‘스팀’. 시도 때도 없는 할인으로 ‘연쇄할인마’라고도 불린다.

최대 규모의 온라인 게임 유통 플랫폼 ‘스팀’. 시도 때도 없는 할인으로 ‘연쇄할인마’라고도 불린다.

다운로드 방식이 게이머의 입장에서 훨씬 더 편리한 것은 사실이다. 물리적으로 게임을 구하러 수고하지 않아도 그저 클릭 몇 번이면 게임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으니까. 요즘엔 심지어 게임 발매 전에 미리 데이터를 내려 받아놓고, 발매 당일 곧장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의까지 제공하고 있다. 다만 나는 이러한 변화가 아쉽게 느껴진다. 게임을 소장하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게임을 결제해도 실물이 남지 않으니, 게임을 소유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디지털 라이브러리 속 내가 결제한 게임이 많다 하더라도, 진열장이 휘어지도록 모아온 실물 게임 타이틀에는 비할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게임 유통사도 나 같은 사람들의 존재를 알고 있기에, 여전히 물리적 게임 패키지도 생산하고는 있다.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뿐이지만.

와이파이만 연결되면 어디서든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구글 스태디아. 클라우드 스트리밍 방식의 스태디아는 아예 게임기마저 없애버렸다.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난 내 취미를 계속해서 영위할 예정이지만, 그 방법에는 분명히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변하는 세상을 아쉬워하기보다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에는 답이 될 것임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이 물리적인 기록매체로 남아있는 한 마지막까지 나는 그들을 구매할 것이다. 그리고 진열장에 꽂아두고 ‘소장’할 것이다.
그것이 내 취미니까.

꿈을 실현해낸다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드림캐스트’. 비록 플레이스테이션2와의 대결에서 패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비운의 하드지만, 그 도전 정신은 유려하면서도 강인한 몸 안에 그대로 담겨 남아있다. 내가 소장한 건 바로 이런 것이다. :)

글/사진
업무지원실 홍보팀 정수영 대리

     

4건의 댓글이 있습니다.

응원해용

2020-02-03 14:45:42

너무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 ^^ 역시 정감독님 못하시는게 없으세요! 취미생활도 글쓰기도! 엄지척척!!

정감독님짱

2020-01-06 10:11:58

국딩 시절 집에 있던 16비트 컴퓨터에 디스켓 꽂고 몰래 게임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래 봤자 고작 팩맨과 너구리 따위였지만요ㅋㅋ 그간 대리님의 기발하고 창의적인 작품들은 미치도록 게임을 사랑했던 정수영어린이의 호기심과 집념이 발현된 결과물이었군요!!! 2020년에도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

위닝 붙어봤던 1인

2020-01-03 16:14:34

대리님 "어느것 하나에 미친적이 없던 사람은 인생의 재미를 모르는 사람" 이라고 누군가 말했다고하던데, 멋지십니다!ㅋ 위닝도 사랑해주십시요ㅎ

정PD후원자

2020-01-03 13:02:26

글잘읽었습니다. 재믹스 1세대부터 시작한 덕후의 시각으로 봤을때 꽤 공감가고 잘 정리한 글입니다. (추천!!)